가지 둘_책

20170316_요나와 함께 걷는40일_안드레아 슈바르츠

j_one0613 2017. 3. 24. 23:15




p.38 : 예언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 하느님이 나를 일부분이 아니라 송두리째 원하신다는 뜻이니까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외롭습니다. 부르심을 받게 되면 나 자신에게서 나와 낯선 사람들에게 가야합니다.

하느님이 사명,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명을 나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헌신해야

한다는 뜻이고, 거기엔 온갖 위험이 따릅니다. 자신을 잃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도 되지요. 하느님은 각자에게 무언가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라시는

건 아닙니다. 그분은 내가 줄 수 있는 것,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p.50 : 하느님은 파도요 바람이시다.

동시에 그분은 돛이자 키이시다.

그러나 항구에 도착하는 이들은 바로 너희다.

(네덜란드 북쪽 프리슬란트 주 어느 섬)

 

p.74 : 요나의 몸짓은 십자가를 연상시킵니다. 그런 긴급한 순간엔 누군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일어설 것을 요구합니다. 요나는 신앙고백과 함께 일어섭니다. 그리고 팔을 벌려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p.78 : 모든 성사는 우리 삶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모든 성사는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 저는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분께 고백합니다. 저를 움직이는 것, 제 마음을 빼앗은 것을 그분께

가져갑니다. 출발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도 그분께 바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저는 새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저와 함께 가신다면!”

 

p.94 : 성경은 본디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세상과 인간 창조 이야기로 시작해서 하느님이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묵시 2,4)

 

p.111 : 속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무언가의 속내에 있다거나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은 주체가 어떤 대상과

가장 깊이 연결될 수도 있다는 뜻. 생명은 깊은 곳에서만 탄생합니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p.120 : 하느님이 주신 것 가운데 하나는 소명입니다. 이는 봉사하기 위한 부르심이죠. 다른 하나는 은사입니다. 이것은

항상 쉽지만은 않은 길을 가는데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 길은 매혹적이기도 합니다. 온갖 고통 중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때가 많습니다.

 

p.121 : 스웨덴의 브리지타 성녀의 기도

주님, 제게 길을 보여주소서.

그리고 그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주소서.

 

p.134 : 요나라는 히브리 이름은 독일어로 비둘기를 뜻합니다. 하느님은 비둘기라고 하는 사람을 니네베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평화와 사랑을 전하며 방향을 잃은 이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예언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P.168 :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은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계산하지 않게

됩니다. 좋은 일을 하면 훗날 보상을 받을 것이고, 나쁜 행동을 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며 머리를 굴리지 않을

것입니다.

 

p.175 : 나치 독재에 항거한 알프레드 델프 Alfred Delp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몸은 건강하나 치유가 불가능한 사람들앞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특별한 유형의 사람에게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그들은 당신의 영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회의 안전과 안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모든게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p.177 : “아우슈비츠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하느님,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유대인 작가이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생존자인 엘리 위젤 Elie Wiesel 이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교수형에 처해진 열세 살 된 소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져온 고통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호흡은 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은 그분의 것입니다.

 

p.185 : 요나 4,10-11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p.192 :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말씀, 소명, 파견,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결별과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도 기돼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계속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