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7_당신이 옳다_정혜신
- 해냄
- 정혜신
p.42 : 존재의 개별성을 무시하는 폭력적 시선
p.45 : ..행패를 부리던 노인 중 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 그 소란에 대해 묻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
...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p.49 : 이럴 때 A에게 산소 공급이란 “집에 또 못 들어가고 있구나.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이 시간에 네가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해.
p.50 :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p.52 : ‘네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먼저
“그렇구나,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지쳤구나, 다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구나, 그럴 많나 일이 있었나 보구나”
-“그런 맘을 들게 했던 그 일이 구체적으로 뭔데?”
p.58 : 나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한다.
p.74 : “상담 선생님에게 얘기를 듣고 엄마는 진짜 놀랐어. 네가 그렇게 힘든 줄 엄마가 미처 몰랐어. 미안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네 마음은 지금 어떠니?”
아이의 눈에 엄마가 눈을 맞추고 그렇게 직접 물어야 한다.
p.79 : “죽고 싶어..”
“그런 마음까지 드는 구나. 언제부터 그랬는데?”
...
“그렇구나. 오래전부터 그랬다면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그렇게 힘들 때는 어떻게 견뎠니?”
p.80 :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p.101 : 사라져가는 ‘나’를 소생시키는 심리적 CPR
p.106 : ‘충조평판’ 날리지 말고 공감하라.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
-평판 :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
-평판 :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니?
-충조평판 :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별다른 사람 있는 줄 아니.
p.109 :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p.110 :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p.127 : 이해가 되면 그에 합당한 감정과 공감이 절로 일어난다. 또 그것을 말하는 이에겐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의 눈길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의 마음을 구석구석 비춰주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 행위 자체가 다정한 공감이고 치유다. / 잘 모르면 우선 찬찬히 물어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시작되는 과정이 공감이다.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물어야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가장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파악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이해이고 앎이다.
p.128 : “내가 잘 몰라서 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물어보는 건데..”하는 단서를 달고 상대방의 상황, 마음에 대해 어떤 것이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고 존중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내 태도만 명확하게 전달이 된다면 혹시라도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해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
p.132 : 존재의 과녁에 도달할 때까지 상대를 놓지 마라.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감에는 과녁이 있다. 과녁에서 멀어지는 대화는 지리멸렬해진다.
p.135 : “그렇게 생각할 만한 어떤 경험이 있으셨나봐요.”
p.148 :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은 절대 금지다.
p.152 :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는다.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실체, 자기 마음의 실체를 하나하나 또렷이 보고 느끼면서 자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해야만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진짜 아는 일이며 그렇게 알아야만 혼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공감자가 되기 위해선 그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돕는 자로서의 ‘내’견해를 말하거나 주장하기보다 ‘그’에게 주목하고 그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p.155 : “지금 말하면서도 맘이 편치 않겠다. 그렇지 않니?”라고 친구의 불안을 먼저 알아주고 짚어줘야 한다. 공감해 줘야 한다. “엄마 얘기를 꺼내기가 정말 힘들었겠다”며 그의 불안에 충분히 눈을 맞춰줘야 한다.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불안을 알아준다는 건 내 존재 자체에 초집중하고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내 존재를 조건 없이 그대로 다 수용해 주는 사람이란 것이다.
p.160 : “엄마는 그러면 안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기만 해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한테 시비를 걸어서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되지.”
p.164 : 아이의 울먹이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엄마는 ‘너(아들)’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리고 빠르게 받아들였다. 겉으로 보기에 정리된 문제가 속마음까지 정리된 게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들도 깊은 공감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길이라는 것을, 예민한 사람들은 더 그렇다는 것을. 엄마의 통찰과 깨달음은 놀랍다.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이런 엄마의 아들이어서 어린 아들도 자기 마음을 정확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엄마의 아들이어서 자기 마음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p.166 : 그녀의 격한 그 말은 ‘다 부수고 나도 죽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 부수고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금 내가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말이다. 그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받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으면 사람은 그 억울함에서 벗어난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만약 그녀가 실제로 부수고 누군가를 해코지했다면 그래도 옳은가. 자해하는 행동을 했다면 그래도 옳은가.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으니 그녀의 파괴적 행동과 판단도 옳은가.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늘 옳지만 그에 따른 행동까지 옳은 건 아니다. 별개다.
p.179 :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경계를 침범하는 행위다. 주권이 훼손되면 사람은 모욕감, 모멸감, 수치심과 함께 그로 인한 분노가 생긴다. 이런 감정들이 올라온다면 내 경계가 침범당하고 있다는 신호다.
p.181 :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독립적이고 온전한 심리적 매커니즘을 가진다. 딸의 남자친구가 맘에 안 들어도 그 남자가 딸의 남편이 되고 자신의 사위가 되면 그 관계에 맞춰 사람의 마음과 판단은 또 달라진다.
p.184 :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적응하는 독립적이고 개별적 존재다. 그 사실을 믿으면 함께 울며 고통을 나누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과 근원이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들이 지닌 경계를 인식해야만 모두가 각각 위엄있는 개별적 존재를 살아갈 수 있다.
p.188 : 어떤 면에서 트라우마 현장 같은 극단적인 고통의 현장에 있는 공감자들은 피해자 보호보다 자기 보호에 사력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기 보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끝내 타인을 공감하는 일을 감당한다.
p.189 : 그 사람 변호해 주는 말은 나중에 하세요. 지금은 충분히 더 화내도 돼요. 그동안 얼마나 화를 삼켰겠어요.
p.194 : 마찬가지로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 아들의 담배 심부름까지 해주는 게 공감이 아니라 아들의 담배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을 비난하지 않고 알아주는 게 공감이다. ...엄마가 아들을 하나의 개별적, 독립적 존재로서 충분히 존중하기로 했다면 엄마와 아들 사이의 경계를 잘 지켜야 하는데 엄마가 그 경계를 넘어갔다.
p.195 : 공감은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엄마가 담배 피우는 것을 허용하고 공감해 줬다고 담배까지 사다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안은 별개다.
“엄마는 네가 담배 피우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개인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미성년자 흡연에 대해 학교나 우리 사회가 갖는 편견이나 규율까지 엄마가 어떻게 할 순 없어. 거기부터는 엄마가 도울 수 없네. 그리고 엄마가 네 담배 사다 주는 일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야.”
p.198 :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p.200 : ‘권위적인 사람’이라는 그럴 듯한 말로 불리지만 그런 식의 일방적인 사람들, 나만 있고 너는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은 상대방의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이다.
p.203 : “그래도 계속 만나야 하는 사이인데 그런 상사와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묻는다면 다시 말할 것이다. 질문이 잘못됐다. 상사를 상수로 놓고 나만 변수로 취급하는 불평등한 인식의 구도 안에서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상사가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는 질문으로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내 삶이기 때문이다.
p.204 : 학대와 자기혐오로 채워진 관계에서 배움과 성숙은 불가능하다. 자기 학대와 자기혐오가 커질 수 밖에 없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끊어야 한다. ..관계를 끊으면 그때서야 상대방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p.211 : “아름 엄마의 친구가 아이를 잃고 힘들어해도 쓰레기 같다고 할 거예요?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어요? 남한테도 하지 않을 말을 왜 자기한테 함부로 해요, 자기한테 사과하셔야 해요!”
p.213 : 발달이 유난히 늦을 뿐 아이는 이해받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p.217 :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건 좋은 일인가. 좋을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얼마든지 있다.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긍정적 감정은 자기 합리화와 기만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때도 있고 자기 성찰의 부재를 뜻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좋은 감정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듯 부정적인 감정도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황마다 다르다. 고정값이 아니므로 개별적 상황마다 다시 성찰해야 알 수 있다.
p.219 : 감정은 판단과 평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런 신호다.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내 감정은 항상 옳다.
p.220 : “이제 좀 그만하지, 이젠 좀 나아졌지, 가족이 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오버야”등의 말이 친구를 잃은 그 아이들에게는 슬퍼하는 걸 나쁘게 여기는 말들이다. 이런 류의 공기 속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온 우리 모두는 사실 슬퍼하는 걸 나쁘게 여기는 집단 무의식을 품고 산다.
p.221 : 내 눈물은 그의 고통에 나도 심리적 참전을 하고 있다는 징표 같은 것이라고. 슬퍼하는 걸 나쁘게 보지만 않아도 누군가의 상처를 말하고 듣는 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유적인 경험이 된다.
p.224 :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것, 사람을 존재 그 자체로 수용하고 공감하는 일이 치유의 근원이라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명제가 두려울 만큼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다.
p.229 : 우리 마음 속에도 그의 ‘수영’같은 것들이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수영’이란 한때 걸려 넘어졌던 돌부리 같은 내 안의 콤플렉스다. 그래서 융통성 넘치고 너그럽다가도 어떤 일에는 심하게 열을 받는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자전거의 왼쪽 페달이라면 자기를 살펴보는 일은 동시에 돌아가는 오른쪽 페달이다. 한쪽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즉시 자전거는 멈추고 넘어진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이 된다.
p.231 : 존재 그 자체에 주목하는 공감을 배우면서 저는 요즘 아이의 붉은 편지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그 아이의 뺨을 때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지 못했던 것, 그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서라기보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동의했던 것...
p.233 : 나는 그녀에게 내 딸이 지금 결혼한다면 “언제든 네 맘에 아니다 싶으면 돌아와라. 너는 그동안 사랑을 많이 받고 현명하게 잘 자랐다. 네가 그렇게 판단하면 언제가 그게 옳은 거다. 언제든 와라. 엄마 아빠는 항상 네 뒤에 있다.”라고 말할 거라고 얘기해 줬다. 부모의 그런 말에 영향을 받아 관계를 쉽게 끝내는 사람은 없다. 절대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부모가 뒤에 있다는 걸 아는 딸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모든 경우의 수를 틀어놓고 합리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p.236 : “너의 뺨을 때린 거, 너의 선택에 화를 내고 조건을 달았던 일이 그 후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용기 내서 사과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어. 네게 큰 상처를 계속 안겨줬던 것이 너무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엄마도 너를 믿고 너의 선택을 존중할게. 미안해."
p.238 : 좋은 대답과 결정이 자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주목하고 공감해 주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끝내 보호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일방적인 계몽과 교훈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 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 뿐이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p.243 :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공감까지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숙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p.246 : 모름지기 여자란, 모름지기 장남이란, 모름지기 성직자란, 모름지기 학생이란... 우리 사회의 이런 집단 사고들은 자연의 곡선을 직선으로 밀어버리는 포크레인 같은 심리적 폭력이다.
p.247 :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이다.
p.251 : 사람을 어느 특정 유형으로 바라보는 일반화의 시선은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게 한다. 그 시선으로는 절대 개별적 존재의 그를 만날 수 없다.
p.257 : 역할에 충실한 관계란 모름지기 주부란, 아내란, 엄마란, 며느리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이다.
p.264 :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p.264 : 잘 모를 때는 아는 척 끄덕끄덕하지 말고 더 물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 걸 수용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건 공감에 대한 강박이지 공감이 아니다. 에너지 소모만 엄청나다.
p.267 : 엄마가 이해한 아들의 마음을 아들에게 다시 거울처럼 비춰주면 된다. “그 곤충은 그냥 벌레가 아니라 우리 아들의 베프였구나” “벌레 한 마리가 죽은 게 아니라 너는 친구를 잃은 거구나” “그런 애를 친구에게 맡긴 걸 후회하니, 아니면 죄책감이 드니?”하고 물으면 아들과 또다른 긴 얘기를 하게 될 것이다.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에 그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p.269 :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아니다. “엄마는 그래본 적인 없지만 너는 지금 친구가 죽은 것처럼 슬픈 거구나, 그런 정도였구나” 그렇게 말하면 된다. ...b:만약 지금 죽어서 a를 볼 수 있다면 죽어서라도 a를 보러가고 싶어요. 너무 소중해요. 나:아...그런 정도였구나, 그렇게나 보고 싶었구나.
p.270 :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그것이 공감적 태도다. 공감적 태도가 공감이다.
p.280 : 무엇보다 엄마가 아이에게 먼저 사과해야 한다. “엄마가 직접 보니까 알겠더라. 그때 네가 한 말이 다 맞았어. 그때 네 말을 믿지 못하고 선생님 편만 들어서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충분히 사과하고 난 후에 “그동안 학교 다니면서 네 마음은 어땠니?”라고 묻기 시작해야 아이가 자기 마음을 말할 수 있다.... 대답을 잘 못하면 더 구체적으로 물어봐 줘야 한다.
p.282 : 상처를 떠올리고 말해서 힘든게 아니라 내 상처가 거부당하는 느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아픈 것이다. ...반복하자면 아팠던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게 고통스러운 것은 그 얘기가 외면당하고 공감받지 못해서다. 거기에 더해 내 고통이 충조평판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다....안전하다는 느낌만 있으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얘기보다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어서다. 공감을 받고 털어내야만 머릿속에서 자기 상처가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아픈 기억의 습격’ 속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다.
p.294 :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