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둘_책

20201018_감춰진 하느님 나라_엘루아 르클레르

j_one0613 2020. 10. 18. 20:27

감춰진 하느님 나라

 

- 분도출판사

- 엘루아 르클레르 지음/연숙진 옮김

- 2020.02~2020.10.18

 

p.9 : 예수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은 인간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장 버림받은 인간의 조건 안에서 이루어졌다.

 

p.21 : 주님의 가난한 이들은 진실을 알고 맛본다. 전능하신 분은 주님이신 한분뿐이며,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그분에게만 속해 있다는 것이다.

 

p.39 : 변함없이 그 고장의 어투를 지닌, 단순함과 선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p.44 : 사람은 빵과 옷보다 존중을 더 필요로 한다. 자신의 인간성을 끊임없이 믿기 위해 사람이 그 무엇보다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에게 존중을 담아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말을 건네는 분의 눈길이다.

 

p.46 :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사람들에게 새롭게 일깨우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그들과 가까이 계심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다.

 

p.49 : 예수님 시대의 대사제들은 모두 사두가이였다. 그들의 태도는 로마 권력자들과는 말썽을 일으키지 말 것.” /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시대에 바리사이들의 수는 6천명에 달했다.

 

p.58 : 예수님의 마음에 불을 지른 하느님의 친밀함.

 

p.60 : 우리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고는 하느님 나라를 맞아들일 수 없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근본적으로 소통하신다고 믿어야 비로소 그분의 나라를 맞아들일 수 있다.

 

p.63 : 참행복 선언 : 루카의 본문이 그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경이롭다. 성경 주해자들에 따르면 루카의 본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p.65 : 루카가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썼다면, 마태오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썼다.

 

p.66 : 예수님이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포하신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나약함과 빈곤을 인식하고 하느님의 은총, 그분의 자애와 자비에 기대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가 넘치도록 채워진다고 말씀하셨다.

 

p.69 :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는 것이면서 한 분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다.

 

p.72 : 예수님이 보시기에 핵심은 바로 사람의 마음가짐과 지향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할 때마다 그 점을 지적하신다. 예수님은 언제나 마음의 바탕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율법주의와 순응주의에서 율법을 해방시킨다. 율법을 진정한 영감으로 다시 이끌고, 그 참된 완성을 보여주신다. 이 완성은 본질적으로 사랑에 있다. 사랑하는 자만이 율법을 완성한다.

 

p.74 :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인식, 이 유일무이한 친밀함을 향해 있고, 이는 생명과 빛의 새로운 원천과 같으며, 예수님이 나누고자 한 새롭고도 창조적인 감정과 같다. / 예수님은 율법에 관해 말할 때조차 당신 메시지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p.75 : 율법을 능가하는 것은 으뜸이 되는, 거저 베푸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 하느님께서 무상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것처럼 우리도 이 자비의 숨결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면서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 심판하지 마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단죄하지 마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하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루카 6,37

 

p.76 : 이 관대함은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한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며 여러분을 헐뜯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오.” 루카 6,27-28

 

p.77 : 하느님께서 그대를 맞아주셨으니, 그대도 그들을 맞아들이시오. 하느님께서 그대를 용서하셨으니, 그들을 용서하시오. 그대의 모든 만남과 모든 관계를 통해 아버지의 너그러움이라는 큰 숨결이 퍼져 나가고 드러나게 하시오. 그대 또한 하느님의 영감 안으로 들어가시오. 그대의 형제들에게 햇빛이 되시오. 땅 위의 보화를 쌓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처럼 되시오.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자비롭고 빛을 비추시오. 그렇소. 그대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시오.

 

p.79 : 여러분의 자유의 법을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 말하고 행동하시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2,2-13

 

p.85 : 그들에게는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는 삶 안에서 얻어지는 이 궁극의 안전함, 순수하고 행복한 신뢰인 어린이의 순진무구함이 없다.

 

p.87 : 그분의 제자들은 모든 자잘한 근심을 버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하면서, 새롭게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현존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자비와 자애의 숨결이 모든 인간 관계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p.96 :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트이고, 친교가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모든 규정을 거슬러 손을 내밀어 그 가엾은 이에게 당신의 손을 댄다. 이 손길에 그 사람은 이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음을 깨닫는다.

 

p.100 : 예수님의 행보마다 그분에게 영감을 주고 길잡이가 된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사람들을 곤경에서 끌어내고, 추락에서 다시 끌어올리며, 그들의 존엄과 기쁨을 회복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배려다. / 사람이 먼저이다. 구원해야 하는 것도, 사랑해야 하는 것도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람이다.

 

p.101 : 구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여인이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비난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았다. / 하느님께서는 자유롭게, 무상으로, 인간에게,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오신다여기서 배제된 이는 한 사람도 없다.

 

p.106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는 것, 그것도 어린이의 방식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과거 속에 가두려고 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이다. 늘 새롭게 창조하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알고 이에 감탄할 줄 아는 것이다.

 

p.108 : 복음서의 비유는 무엇보다 인간의 깊은 감수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분명 지극히 단순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일상의 단순함을 눈여겨볼 줄 안다.

 

p.114 :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비탄과 그가 처한 불쌍한 처지만을 본다. 아버지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아들을 그러한 비탄에서 빼내어 그의 존엄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 밑바닥까지 추락한 그였지만 아버지에게는 변함없이 소중한 아들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순간 그는 완전히 새롭게, 곧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자식의 마음으로 아버지라고 말할 줄 알게 된다. 바로 여기에 복음적인 회개의 본질이 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깨달아 우리의 죄마저 뛰어 넘어 하느님께 아버지라고 말할 줄 아는 것이다.

 

p.116 : 큰아들... 사실 이날 그가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진심으로 함께 나눈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 이 순간 큰아들을 아버지에게서 떼어 놓는 것, 그를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게 한 것은 정확히 말해 그 자신에게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매우 강한 자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에 갇힌 큰 아들의 눈에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관대함은 완전히 사리에 맞지 않고 부당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를 그는 마땅한 자격이 있는 자신에 대한 일종의 모욕으로 느꼈던 것이다. / ..이는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예수님의 화법으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또한 특별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p.121 : 회개와 은총은 동일한 하나다. 복음적 의미에서 회개한다는 것, 돌아선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기쁜 소식을 믿는 것, 하느님 나라를 그 무상성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 새롭게 또 순전히 거저 주어진 하느님의 가까움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p.123 : 하느님과 맺는 대조적인 두 종류의 관계. 한쪽에는 분배 정의를 바탕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 스스로 행한 일들과 자신이 기울인 노고를 믿고 자신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품삯처럼, 마땅히 받아야할 몫처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쪽에는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에 의지하는 사람들. 첫부류는 노력을 다한 뒤 그들에게 마땅한 대우를 받은 것에 실망을 느끼고, 다른 부류 사람들은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고 놀라면서도 기뻐한다. 그들은 감탄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은총을 깨닫는다.

 

p.130 : 복음적 회개는 그처럼 온 존재를 뒤흔드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이 드러나 아를 접하게 된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실상 당신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행동이다.

 

p.132 :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셨듯이 그가 동포들에게 자비로우면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무상성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기로 마음먹을 때에 비로소 복음적 회개는 이루어진다. 사람은 아버지에게서 오는 자비와 자애의 숨결을 그가 맺는 모든 관계 안에 다시 불어넣고자 노력할 때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은총으로 살아갈 수 있다. / 하느님에게 사랑받고, 그분에게서 거저 용서받고 환대받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것을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행해야 한다. 하느님께 받은 것과 같은 자비와 사랑으로 동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p.136 : 내가 연민과 사랑의 움직임 속에서 가까이 다가가는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이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 이었다. 그런데도 불행에 빠진 이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p.141 : 마르타. 예수님이 집안일을 하찮게 본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많은 일들로 분주한 마르타를 나무란 것은, 남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자와 동일시되는 여자의 직무에 매몰되지 말라는 권고이다. 여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이 완전히 새롭다.

 

p.142 : 예수님은 여자를 직무가 아니라 소명으로 본다. 여자를 종으로 삼으려는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히 존재하라고 요청한다. 예수님은 여자라는 존재의 가장 좋은 몫이라는 이름으로 마르타를 잘못 만들어진 거짓 자아로부터 지켜준다.

 

p.146 : 예수님이 어린이들에게서 보시고 높이 평가하신 것은 바로 어린이들이 지닌 신뢰의 도약이다. 의심하지 않고 단숨에 믿는 도약을 통해 어린이들은 열린 존재, 수용적인 존재가 된다.

 

p.147 : 정의 그 자체가 참으로 인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자비와 사랑이 스며 있어야 하고 그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사랑과 자비를 정의와 함께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회 관계망 안에 불어넣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 제자들의 사명이다.

 

p.148 : 황제의 모상이 새겨진 동전은 황제의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진 사람은 하느님의 것이다. 인간 안에는 황제와 그 권력에 속하지 않은 부분, 그 어떤 지상의 권력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초월적 부분이 있다.

 

p.152 : 그 날과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 외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모릅니다. 이제 스승님은 제자들이 이 하느님 나라의 차원, 곧 시간, 기간에 마음의 눈을 뜨도록 이끄신다.

 

p.153 : 중요한 것은 생명의 성장을 존중하는 것이다. 수확의 때가 아니라 씨를 뿌리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시간 사이에 성장의 시간이 있다. 바로 하느님께서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며, 이는 은총의 유예다. 이 시간은 하느님 나라의 은총의 차원이다. 복음의 사람은 모든 조바심을 떨쳐 내고 이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p.154 : 복음의 사람은 현재의 불완전함을, 밀 가운데 가라지가 섞여 자라나는 것조차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 이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하고 서로 뒤섞여 있다. 단번에 결정적으로 세워질 어떤 완전한 세상인 양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오히려 인내와 자비를 갖추어야 하는데, 세상과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자라나기 때문이다.

 

p.155 : 하느님의 나라는 인류 역사와 무관하게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추구되는 모든 것 안에서, 또 그와 관계를 맺고 자라난다. 하느님 나라는 또한 사람들의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비로소 그 모든 차원을 이루게 된다.

 

p.162 :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 (히브5,8)

 

p.163 : 저주받은 자들과 배척당한 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은 예수님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부재를 외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을 현존하게 할 것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없다면 복음이 한낱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듣기 좋은 동화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해했다. 십자가의 죽음만이 기쁜 소식에 그 진정성을, 곧 하느님의 사랑의 무게와 깊이를 가져다줄 수 있다.

 

p.173 :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것만이, 이를 통해 얻게 되는 놀라운 기쁨만이 지고한 자기 비움으로 이끌 수 있다. 복음적인 내려놓음은 좌절이 아니다. 그것은 충만함에서만 생겨난다.

 

p.184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것과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것은 회당의 전례를 마치며 바치는 기도 카디시의 내용이었다. “주님께서 당신 뜻에 따라 창조하신 세상에서, 위대하신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시고 거룩히 빛나소서! 우리 생전에, 우리 날 동안에, 모든 이스라엘 집이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의 나라가 어서 빨리 임하소서. 주님의 위대하신 이름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p.187 : 마귀를 몰아내는 눈부신 성공보다, 그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하느님 나라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 요컨대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까이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p.199 : 사람의 최종 운명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성사다. 로크플로” / 그들처럼 예수님에게 인간의 종교적 진리, 계약의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 맺는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다른 이들에 대한 호의,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자비에 있다. 비인간적인 비참함에 잠긴 타인을 환대할 때 우리는 절대타자이신 분의 환대를 받는다.

 

p.201 :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가 겪는 곤경을 통해 우리에게 오고, 한쪽과 일치를 이루지 않으면 다른 한쪽과도 일치를 이룰 수 없다. 나와 한 동포인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마음을 닫은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곧 하느님 나라에서 배재된다. 반면에 자기 형제의 비참함에 마음을 여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오는 사랑의 물결이 넘쳐 흐른다.

 

p.209 : 예수님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짐승의 굳기름이나 피가 아니라, 순수한 찬미, 정의와 자비에 열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미임을 일깨운다. 가난한 이, 이방인과 억압받는 이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바로 그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참된 희생 제사이다.

 

p.217 :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예수님의 몸짓을 재현할 때마다 제자 공동체는 그분의 죽음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선물과 그 결실, 곧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현재화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 공동체는 결정적인 행동, 곧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 속에서 친교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p.221 : 이 순간은 하느님도 침묵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사람답게 존재하도록, 완전히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시간이다. 사람이 스스로 제 운명을 떠안고 그 의미를 부여하도록 주어진 시간이다. / 기도를 하고 나면 사람의 마음이 더 이상 처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p.228 :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람에게 안겨주고, 사람을 하느님께 안겨 드렸다. / 제라르 로세 : 사람과 하느님의 친교가 회복된 것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벌하신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비참함 속에 깊이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삼위일체 한가운데 깊이 잠긴 그 순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 곁에 그분이 계셨기에 사람과 하느님의 친교가 회복되었다.

 

p.231 : 주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죽지 않았던 것처럼 수난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예전의 익숙한 틀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p.239 : ..이 순간부터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 개개인의 고독에서 나와, 부활하신 분과 함께하는 공도체로 들어간다. 물론 이때에는 두 제자뿐이었지만 부활 체험은 언제나 공동체적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부활 체험이 공동체를 만든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은 함께 한다. / 빵을 나누는 단순한 동작으로 불현듯 부활의 빛이 제자들의 마음에서 켜진다.

 

p.241 :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르16,13.” 따라서 부활 신앙은 언제나 체험을 전제로 한다. 주님은 당신 죽음의 의미를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며 그들이 흩어짐과 고독의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셨다.

 

p.251 :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