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0_빨간 머리 앤이 하는 말_백영옥
결혼이란건, 말하자면 앞으로 저 사람이 네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온갖 고통을 주게 될 텐데, 그 사람이 주는 다양한 고통과 상처를 네가 참아낼 수 있는지, 그런 고통을 참아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네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될 거야.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누가 주는 상처를 견딜 것인가는 최소한 네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해야만 해. 그러니까 이 남자가 주는 고통이라면 견디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러면 최소한 덜 불행할 거야. 물론 행복을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라면, 때때로 견디는 일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될 거란 얘기야!
슬픔에 반응하는 우리 각자의 시간표는 전부 다르다. 그것은 오직 나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앤의 말이 맞다. 기운이 날 것 같지 않고, 나게 하고 싶지도 않다면, 슬픈 채로 있는 게 낫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이고, 울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무게를 덜어내는 게 아니다. 흘러 넘쳐야 비로소 줄기 시작한다. 그래야 친구들이 다가오고, 함께 슬퍼할 수 있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에야 슬픔은 끝난다.
슬픔을 슬픔 이외의 것으로 뒤섞지 말아야 한다. 슬픔을 분노로 바꿔 왜곡시키면 스스로 애도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외로움을 배고픔으로 착각해 폭식하거나, 우울을 우울의 증상인 단순한 수면장애로 오해해 방치하면, 우리는 점점 더 싶이 병든다. 슬픔은 제대로 다뤄졌을 때에만 시간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진다. 자기 안에 감정들을 분리해 다독인다는 건..
앤이 친숙한 에이본리를 떠나, 퀸 학원이 있는 대도시에 왔을 대 그녀 역시 라일리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다. 깊은 슬픔에 잠겨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은 익숙하고 사랑하던 무언가를 잃었을 때다.
정한 기쁨은 슬픔을 튀어나오지 못하게 가둬버리려 한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슬픔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구조신호라를 점에 주목한다. 가령 눈물을 보고 달려온 가족과 친구들의 공감은 슬픔에 빠진 사람을 결국 더 깊게 성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슬픔은 삶을 통찰하게 하고, 우리에게 누가 진짜 친구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들 속에서도 낡아가는 시간의 주름을 본다고. 눈에 보일리 없는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리 없는 것들이 들리기 시작하면 곧 어른의 시간이 된다고 말이다.
앤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간다. 앤은 아저씨와의 추억을 기억해낸다. 결국 앤은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아저씨가 자신에게 해주었을 말을 떠올린다. 비는 그칠 것이다. 눈은 잦아들고, 바람은 지나갈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조차, 좌표를 바꾸며 끊임없이 변한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바꾼다. 하지만 지금의 앤에게 슬픔을 참으라고 말하지 않겠다. 슬픔은 참아서 잊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약이란 말도 하지 않겠다.아직 슬프다면 더 울어야 한다. 눈물이 더는 흐르지 않는 시간이 되면, 얼마간 담담해진 얼굴로 피어 있는 꽃도 보고, 반짝이는 달도 별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처가 회복된다고 해도, 인간에겐 흔적이 남는다. 우리는 것을 흉터라 말한다. 흉터를 안은 채, 죽지 않고 살아내는 것. 견디거나 버티는 것, 어쩌면 삶은 그런 것에 보다 가까울지 모른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는 건 어쩜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일는지도.. 벚꽃이 바람에 비처럼 흩날린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느 4월이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의 외로움은 조금 더 증폭돼 내게 고독의 형태로 다가와 있었다. 내가 선택한 건 24시간 연결이 아닌 타인과 단절된 채,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였다. 그곳에서 내가 느낀 건 행복이 아니라 다행스러움이었다. ‘무엇을 할 자유’가 아니라,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며,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이곳까지 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셋 다야. 여행을 빙자로 달아나서 쉬고 싶은 게지. 너 번아웃 된 거 같다.
누군가의 성공담에는 교훈이 있지만 위안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패에서 위로받는다. 내가 그걸 알게 된 건 서른세살이 되던 가을이었다. 소설가를 꿈꾸며 매일 일기를 쓴 아홉 살 이후 24년의 시간. 소설을 투고하기 시작한지 정확히 13년 되던 해였다.
인간이 언제 위로받는 줄 알아? 쟤도 나처럼 힘들구나! 바로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때야.
내게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되돌아오는 일이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집에 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 앤에게 마릴라와 매튜가 있었던 것처럼.
매튜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마릴라는 단호한 원칙주의자지만, 매튜는 가끔 그 원칙을 뛰어넘는다. 매튜는 ‘앤이 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믿고 있어’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행동을 바라본다. 음양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들은 앤에게 완벽한 양육자들이다. 매튜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도 앤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매튜의 깊은 사랑으로 결핍 없는 독립체로 자랄 수 있었기 때문에, 매튜의 죽음에도 앤은 그토록 어른스럽게 처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앤은 리본이 달린 퍼프 소매 원피스를 선물 받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감격한다. 선물이 분에 넘치는 사치품이든,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든, 중요한 건 나를 생각해준 누군가의 관심을 아는 일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건 모진 세상을 살면서 쉬어갈 수 있는 안전지대를 만든다는 의미일테니까.
앤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녀에겐 행복을 그려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앤은 끝없는 사막 속에서도 오아시스를 상상하며 눈앞의 모래바람을 지나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연을 기다리는 힘. 시간을 견디는 힘. 열한 사랑 앤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을 이야기다.
한 그루의 평범한 벚나무를 아늑한 자기만의 방으로 멋지게 바꿀 줄 아는 앤은 사랑스럽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앤의 그 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다.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